본문 바로가기

영화학

프랑스 영화감독 고다르의 일생

반응형

고다르는 1930년 12월 3일, 파리 7구 코냑 제가 2번지에서 넷째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30년 1월 6일 태어난 누나라 셸은 1993년 사망했다. 여동생 베로니카는 사진가이다.
장뤼크 고다르의 아버지 폴 곤다고(1899-1964)는 1899년 5월 1일 프랑스 북부 출신의(그 카토-캉브레시) 어머니와 상세르의 옛 개신교 가문 태생으로 셰르 출신의 아버지 조라주 고다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6년 폴 고다르는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가족과 함께 스위스에 이민하여서, 처음에는 보게, 이후 제네바에 자리를 잡는다. 폴 고다르는 이후 의학을 공부했으며, 1922년 파리에서 자신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파리와 스위스를 오고 가며 일했다.
장뤼크 고다르의 어머니, 오딜 모노(1909-1954)는 1765년 제네바에서 태어난 장 모노 목사와 1802년 태어난 아돌프 모노 목사의 후손으로 프랑스의 개신교 유력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다르의 외할아버지, 쥘리앵 모노는 동양 금융 회사(Société financière d'Orient)를 운영하였으며, 파리·네덜란드 은행의 창립자 중 한 명이다. 1924년, 쥘리앵 모노는 라스파유 대로 16번지에 있는 건축가 앙리 소바주가 설계한 아파트를 산다. 그는 작가들과 자주 만나며, 1924년 만난 폴 발레리와 매우 친밀히 지내게 된다. 시인을 대단히 찬미하던 아돌프 모노는 방 한쪽에 시집과 시인들의 원고, 서간을 모으고, 그 방을 "발레리아눔valerianum"이라 이름 붙였다.
폴 고다르는 오딜 모노와 1928년 10월 16일 루브르 예배당에서 결혼한다. 1933년, 폴 고다르는 스위스의 병원에서 일자리를 얻어, 고다르 가족은 1936년 니옹으로 가기 전에 니옹과 롤 사이에 있는 레망 호숫가의 프리외레가 4번지에 자리를 잡는다. 장 뤽 고다르는 1936년부터 니옹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고다르는 유년 시절에 특히 운동에 빠져, 축구, 스키, 농구 등을 했다. 고다르의 유년기에 있어서는 개신교가 큰 역할을 했다. 어린 장 뤽 고다르의 첫 관심은 미술이었다. 고다르가 어린 시절 그린 작품은 폴 클리와 오스카르 코코슈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다르는 앙티쉬르레망에 있는 외조부 소유의 저택에서 방학을 보냈다.
1940년 6월,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 장 뤼크 고다르는 파리의 외조부모와 함께 지냈다.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다시 가기 전, 고다르는 1940년 개학을 앞두고 있을 때 브르타뉴에 살던 이모 오드에게 보내졌다. 고다르의 외가인 모노 가문은 공화파이자 좌파에 가까웠으나, 외할아버지 쥘리앵 모노는 더 보수적이었고, 페탱 장군을 옹호하며, 친독 신문을 읽었다. 이와 반대로, 고다르의 부모는 적십자에서 일하며 친영파에 가까웠다.
전후, 장 뤽 고다르는 니옹의 콜레주(중학교)에서 졸업장을 따고, 바칼로레아를 치기 위하여 파리의 리세 뷔퐁(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고다르는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별거를 하게 된다. 고다르의 아버지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에 시달리며, 처가의 태도를 견딜 수 없었는데, 어머니는 친정과 멀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고다르의 어머니는 1949년 남편을 떠나 제네바로 이사갔으며, 이후 1951년 로산으로 가게 되며, 결국 1952년 11월 고다르의 부모는 이혼하게 된다. 고다르는 이후 아사스가에 있는 작가이자 출판업자인 장 슐룅베르제의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 거주하게 된다. 고다르는 학업에 흥미를 잃었으며 1947년 바칼로레아 취득에 실패한다. 고다르는 영화 클럽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고다르는 영화에 눈을 뜬 것뿐만 아니라, 《레뷔 뒤 시네마》에 적힌 비평문을 읽기도 했는데, 특히 오늘날 에릭 로메르로 더 잘 알려진 모라스 셰레르의 글을 읽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장 뤽 고다르는 니옹에서의 청소년기 때부터 도둑질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 습관은 편집증적이 되었으며, 장 뤽 고다르는 친척이나 친구의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장 슐룅베르제의 서재에서 책을 훔치고, 퐁뇌프에 그것을 팔기도 했다. 또한 고다르는 외할아버지의 서재에서 폴 발레리의 작품을 훔치고, 외할아버지 집과 마주보고 있는 갈리마르 서점에 팔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는 그것을 알아차렸고, 장 뤽 고다르는 17살에 집안의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얼마 지나, 그는 또 1952년 《카예 뒤 시네마》의 금고에, 그리고 팔레루아얄 근처에 있으며 친구의 아버지 샤를 비치가 운영하는 카페 드 라 코메디의 계산대에 손을 대기도 했다. 가족과 연을 끊은 고다르는 1947년 11월 《집안. 또는 전체의 인상Le Cercle de famille. Ou impressions d'ensemble》이라는 제목의 가족에 대한 비방글을 쓴다.
고다르는 1948년 스위스로 돌아와서, 로산의 콜레주 레마니아에서 바칼로레아를 준비한다. 재수를 하고도 바칼로레아에 실패한 후, 그는 삼수 끝에 1949년 바칼로레아를 취득한다. 이 시기, 고다르는 미술, 영화, 문학 중에 무엇을 할 지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샤를페르디낭 라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알린Aline》이라는 제목의 첫 시나리오를 썼다.
1949년 가을, 고다르는 파리 소르본 인류학과에 입학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학과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소르본에서 고다르는 훗날의 쉬잔 쉬프망이자 많은 영화에서 고다르와 함께 협업하게 되는 쉬잔 클로셴들러(Suzanne Klochendler)와 작가 장 파르뷜레스코(Jean Parvulesco)를 만나게 된다. 고다르는 조르주 메레디트의 《약혼녀La Fiancée》를 원작으로 한 두번째 시나리오, 《아이러니의 중단, 클레르La Trêve d'ironie, Claire》를 집필한다.[13] 이 시기 고다르는 영화를 엄청나게 많이 보았다. 앙리 랑글루아가 운영하는 시네마테크에서, 고다르는 쉬잔 클로셴들러, 프랑수아 트뤼포, 장 그뤼오, 자크 리베트와 정기적으로 만나게 된다.[14] 고다르는 또한 1947년 프레데리크 프뢰셸이 설립한 카르티에 라탱 영화 클럽에도 드나들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모리스 셰레르, 폴 제고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그뤼오, 리베트를 만난다. 이 영화 클럽은 《카르티에 라탱 영화 클럽 회보Bulletin du ciné-club du Quartier latin》를 간행했는데, 이 회보는 이후 1949년 말 《가제트 뒤 시네마》라는 이름의 진짜 영화지가 된다. 19살에 쓴 고다르의 첫 비평이 실린 것 역시 바로 이 회보이다. 고다르는 1950년 6월부터 11월까지 12편의 기사를 본명으로, 또는 자신의 이름인 장 뤽(Jean-Luc)를 독일어화한 한스 루카스(Hans Lucas)라는 필명으로 실었다. 1950년 9월, 고다르는 카르티에 라탱 영화 클럽의 친구들과 함께, 장 콕토가 주관하는 옵젝티프 49 영화 클럽 주최의 비아리츠 영화제에 참가한다. 이 영화제는 《가제트 뒤 시네마》 주변으로 모여든, 선배들이 편성한 것에 대하여 아낌없이 비판하는 젊은 비평가들의 지지가 있던 중요한 순간이었다.
1950년 12월, 고다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메리카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고다르는 먼저 뉴욕을 방문했으며, 이후 아버지가 정착하고자 구매한 저택이 있는 자메이카의 킹스톤으로 간다. 장 뤽 고다르는 그 다음 혼자서 몇 달간 남아메리카 여행에 떠난다. 고다르는 1951년 4월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까지 파나마,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을 다녀간다.

반응형

'영화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벨바그의 장뤽고다르_네멋대로해라  (0) 2022.06.18
히치콕과 레베카  (0) 2022.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