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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학

누벨바그의 장뤽고다르_네멋대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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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포스팅한 히치콕과 함께 가장 영화학도 시절 공부한 감독 중 기억에 오래 남는 감독은 장뤼크 고다르다.
 장뤼크 고다르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자 영화 평론가이다.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바그의 핵심 인물이며, 여러 혁신적인 업적과 시도로 영화 혁명가라 불리기도 한다. 누벨바그의 카 예 뒤 시네마 출신 감독 5명 중에서 마지막 생존자이자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누벨바그 멤버이기도 하다. 1930년 출생한 그는 201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마지막으로 받았으며 아마도 훗날 영화감독 중 가장 오래 활동한 감독이지 않을까.
그의 공로는 아래와 같다.
2010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평생공로상 
2007 제20회 유럽 영화상 유럽 영화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2001 제12회 스톡홀름영화제 평생공로상
1998 제23회 세자르 영화제 명예 세자르상
1994 제59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 특별상
1991 제25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 특별공헌상
1987 제12회 세자르 영화제 명예 세자르상
1983 제40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1967 제31회 베니스영화제 특별심사위원상
1962 제26회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대상

고다르는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대본 작가를 겸임하며, 편집까지 스스로 담당하기도 했다. 가끔 단역으로 자기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에릭 로메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처럼 영화 평론가로서 경력을 시작하였다. 주로 《가제트 뒤 시네마》, 《하예 뒤 시네마》, 《아르》에 글을 기고했다. 동시에 스위스의 그랑드디상스 댐 건설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콘크리트 작전 Opération béton (1954)》, 모파상에 영감을 받아 예산 없이 찍어낸 《아양떠는 여자Une femme coquette (1955)》, 에릭 로메르와 함께 멋부린 문체로 쓴 《모든 청년들은 파트리크라고 불린다. Tous les garçons s'appellent Patrick 또는 샤를로트와 베로니크Charlotte et Véronique》, 프랑수아 트뤼포가 촬영하고 고다르가 이미지를 편집한 《물의 이야기Une histoire d'eau (1958)》, 마지막으로 《샤를로트와 그녀의 정부Charlotte et son jules (1958)》같은 16mm 단편을 찍기도 했다.
1959년, 《네 멋대로 해라》의 촬영과 함께 장편 영화를 촬영한다.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고, 누벨 바그의 시조격 영화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된다. 1960년대 고다르는 일 년에 여러 편의 영화를 찍으며, 여러 기획을 진행한다. 또한 고다르는 알제리 전쟁에 관한 영화 《작은 병정Le Petit Soldat》과 뮤지컬에 대한 경의를 담은 영화 《여자는 여자다Une femme est une femme》를 찍는다. 이후 고다르는 매춘을 하는 젊은 여성에 관한 영화 《자기만의 인생Vivre sa vie (1962)》, 전쟁에 관한 신작 《기관총 부대Les Carabiniers (1963)》, 영화계를 다룬 영화 《경멸Le Mépris (1963)》을 찍는다. 고다르는 1964년 《국외자들Bande à part》과 《유부녀Une femme mariée》를 찍으며 영화 활동을 이어간다. 1965년, 고다르는 SF 영화 《알파빌, 레미 코숑의 기이한 모험Alphaville, une étrange aventure de Lemmy Caution》을 감독하며, 그 다음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로드 무비 《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를 찍는다. 이후 고다르는 청춘들에 관한 영화 《남성 여성Masculin féminin》, 《메이드 인 USAMade in USA》, 다시 매춘이라는 주제를 다룬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세가지 것들Deux ou trois choses que je sais d'elle》, 《중국 여인La Chinoise (1967)》, 《주말Week-end (1967)》을 찍었다.
이후 고다르는 일류영화인으로서, 지식인 계층과 예술계를 이끄는 인물 중 한 명이 된다. 1968년, 그의 몇몇 이전 영화에서 이미 예견된 5월 사태는 기존 영화 체계와의 단절의 기회였다. 고다르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이 되며, 소외당한다. 고다르는 장피에르 고랭과 함께 정치 영화를 만들고자 시도했으며, 지가베르토프라는 집단 필명하에 영화를 제작했다. 한편 이 시기 고다르의 영화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74년부로, 고다르는 동거녀 안마리 미에빌과 함께 비디오 촬영을 실험하며, 텔레비전 매체를 통하여 작업하며, 영화와는 거리를 둔다.
고다르는 1980년대 《도망쳐라 (인생)Sauve qui peut (la vie)》으로 영화계로 복귀한다. 이후 1960년대의 고다르로, 프랑스 영화계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1980년대 말, 고다르는 영화의 영화적인 역사를 구성하고자 시도한 《영화사Histoire(s) du cinéma》라는 제목의 영화-에세 연작 제작에 몰두하며, 1998년 완성하게 된다. 2000년대, 고다르는 《사랑의 찬가Éloge de l'amour (2001)》, 《우리의 음악Notre musique (2004)》, 《필름 소셜리즘Film Socialisme (2010)》과 같은 영화를 통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또한 고다르는 파리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전시를 열기도 하였다. 고다르는 가장 야심적으로 계획한 전시를 결국 단념했지만, 원 전시 계획의 축소판은 《Voyage(s) en utopie. À la recherche d'un théorème perdu. JLG 1945-2005》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장 뤽 고다르는 1965년 《알파빌》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였으며, 은곰상(《네 멋대로 해라》로 감독상, 《여자는 여자다》로 심사위원 그랑프리)을 두 번 수상했다. 고다르는 또한 1982년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 영예상(경력상)을 받았고, 1983년 《카르멘이라는 이름Prénom Carmen》으로 황금사자상 작품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고다르는 2014년 《언어와의 작별Adieu au langage》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으며, 1987년과 1998년 세자르 영예상을 두 번 받았고, 2010년 자신의 전체 경력으로 오스카 영예상을 받았다. 2018년 고다르는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자신의 모든 작품과 《그림책Le Livre d'image》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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